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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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1976년 12월 5일에 실시되었으며, 록히드 사건으로 인한 미키 다케오 내각의 지지 기반 약화와 중의원 해산 실패를 배경으로 치러졌다. 선거 결과, 자유민주당은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으나 제1당 지위를 유지했고, 일본사회당, 공명당, 민사당, 일본공산당, 신자유클럽 등이 의석을 얻었다. 자민당은 무소속 의원을 추가 공인하여 원내 과반수를 유지했다. 이 선거는 일본 정치의 다당화 경향을 심화시켰고, 후쿠다 다케오 내각 출범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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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 다케오 내각은 후쿠다 다케오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1976년 12월 24일부터 1978년 12월 7일까지 존재했으며, 여러 차례의 각료 교체와 1977년 11월 28일 개각을 거쳤다.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
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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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개요 | |
국가 | 일본 |
선거 유형 | 의회 |
선거일 | 1976년 12월 5일 |
이전 선거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972년 |
다음 선거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1979년 |
선출 의석 | 511석 |
과반 의석 | 256석 |
투표율 | 73.45% ( 1.69%p) |
주요 정당 및 후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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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1 | 자유민주당 |
정당1 로마자 표기 | Jiyūminshutō |
정당1 지도자 | 미키 다케오 |
이전 선거 결과1 | 271석, 46.85% |
선거 전 의석1 | 265석 |
획득 의석1 | 249석 |
의석 변동1 | 16석 |
득표수1 | 23,653,626표 |
득표율1 | 41.78% |
득표율 변동1 | 5.07%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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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2 | 일본사회당 |
정당2 로마자 표기 | Nihon Shakaitō |
정당2 지도자 | 나리타 도모미 |
이전 선거 결과2 | 118석, 21.90% |
선거 전 의석2 | 112석 |
획득 의석2 | 123석 |
의석 변동2 | 11석 |
득표수2 | 11,713,009표 |
득표율2 | 20.69% |
득표율 변동2 | 1.21%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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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3 | 공명당 |
정당3 로마자 표기 | Kōmeitō |
정당3 지도자 | 다케이리 요시카쓰 |
이전 선거 결과3 | 29석, 8.46% |
선거 전 의석3 | 30석 |
획득 의석3 | 55석 |
의석 변동3 | 25석 |
득표수3 | 6,177,300표 |
득표율3 | 10.91% |
득표율 변동3 | 2.45%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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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4 | 민사당 |
정당4 로마자 표기 | Minshatō |
정당4 지도자 | 가스가 잇코 |
이전 선거 결과4 | 19석, 6.98% |
선거 전 의석4 | 19석 |
획득 의석4 | 29석 |
의석 변동4 | 10석 |
득표수4 | 3,554,076표 |
득표율4 | 6.28% |
득표율 변동4 | 0.70%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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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5 | 일본공산당 |
정당5 로마자 표기 | Nihon Kyōsantō |
정당5 지도자 | 미야모토 겐지 |
이전 선거 결과5 | 38석, 10.49% |
선거 전 의석5 | 39석 |
획득 의석5 | 17석 |
의석 변동5 | 22석 |
득표수5 | 5,878,192표 |
득표율5 | 10.38% |
득표율 변동5 | 0.11%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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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6 | 신자유클럽 |
정당6 로마자 표기 | Shin Jiyū Kurabu |
정당6 지도자 | 고노 요헤이 |
이전 선거 결과6 | 신당 |
선거 전 의석6 | 5석 |
획득 의석6 | 17석 |
의석 변동6 | 12석 |
득표수6 | 2,363,985표 |
득표율6 | 4.18% |
득표율 변동6 | 신당 |
선거 결과 | |
총리 | 내각총리대신 |
선거 전 총리 | 미키 다케오 |
선거 전 총리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선거 후 총리 | 후쿠다 다케오 |
선거 후 총리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2. 선거 배경
제33회 중의원 선거 이후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이 금맥 문제로 사퇴하고, 록히드 사건에 대한 다나카의 연루 의혹이 제기되었다. 미키 다케오 수상은 록히드 사건 수사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으나, 이는 자민당 내 반발을 샀다. 결국 미키는 해산권을 행사하지 못한 채 임기 만료를 맞았다.[3]
1976년 12월 5일에 실시된 총선거는 일본국 헌법 하에서 유일하게 임기 만료로 실시된 총선거이며, '록히드 선거'로 불렸다.[3] 자민당은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했고, 일본 사회당과 일본 공산당은 의석수가 감소했다. 공명당과 민사당은 의석을 늘렸다.[1]
이번 총선거는 중선거구제로 실시되었으며, 대도시 지역 유권자 증가에 따라 총 의석수가 491석에서 511석으로 20석 증가했다.
2. 1. 록히드 사건과 미키 내각
제33회 중의원 선거는 다나카 내각에 의해 실시되었다. 이후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은 금맥 문제로 인해 1974년 12월에 사퇴했고, 1975년부터는 록히드 사건에 다나카가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1] 다나카의 뒤를 이은 미키 다케오 수상은 록히드 사건 수사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는데, 이는 다나카파는 물론이고 자민당 내 대다수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미키 오로시).[1] 특히 미키 내각은 당시 대한민국 6.25 전쟁 참전 용사 출신으로 반공주의 성향이 강한 박정희 대통령과 이념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1976년 7월 27일 다나카 체포 전후, 법무대신 이나바 오사무(나카소네파)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기 때문에, 미키 외에 이나바에 대한 다나카파의 반발도 커졌다. 미키는 중의원 해산 및 총선거를 통해 당내 지도력을 회복하려 했지만, 당내에서는 해산을 막으려는 목소리가 높아 결국 중의원 해산권을 행사하지 못한 채 중의원 임기 만료를 맞이했다.
2. 2. 중의원 해산 논란
미키 다케오 총리는 록히드 사건 추적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고, 이는 자민당 내 다수 세력의 반발(미키 오로시)을 샀다.[3] 1976년 7월 27일 다나카 가쿠에이 체포 전후, 법무대신 이나바 오사무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 다나카 파의 감정적인 반발을 샀다. 미키는 당내 지도력 회복을 위해 중의원 해산·총선거를 통한 정국 돌파를 시도했지만, 당내 반대 세력은 해산 저지에 나섰다. 결국 미키는 일본 헌법에 보장된 중의원 해산권을 행사하지 못한 채 중의원 임기 만료를 맞이했다.[3]2. 3. 선거 제도
이번 총선거는 중선거구제와 일부 소선거구제가 혼합된 형태로 치러졌다. 유권자 증가에 따라 총 의석수가 491석에서 511석으로 20석 증가했다.- 선거 제도:
- 중선거구제: 3인 선거구 47개(4개 증가), 4인 선거구 41개(2개 증가), 5인 선거구 41개
- 소선거구제: 1인 선거구 1개
- 투표 방법: 비밀투표, 단기투표, 1표제
- 선거권: 만 20세 이상의 일본 국민
- 피선거권: 만 25세 이상의 일본 국민
- 유권자 수: 77,926,588명 (남성: 37,724,016명, 여성: 40,202,572명)
3. 선거 결과
1976년 12월 5일에 실시된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자유민주당(자민당)이 1955년 창당 이후 처음으로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한 선거였다. 이 선거는 록히드 사건이 큰 영향을 미쳐 ロッキード選挙|록히드 선거일본어라고도 불린다.[3]
미키 다케오 총리의 개혁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자민당은 당내 분열과 록히드 사건의 여파로 22석을 잃었다.[1] 그러나 보수 성향 무소속 의원들을 추가 공인하여 과반 의석을 유지했다.
사회당은 의석을 소폭 늘렸지만, 사사키 고조, 가츠마타 세이이치, 에다 사부로 등 주요 인사들이 낙선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 공산당은 일본 공산당 스파이 심문 사건 등의 영향으로 의석이 크게 줄었다. 반면, 공명당과 민사당은 의석을 늘렸다. 특히, 고노 요헤이 등이 창당한 신자유클럽은 '깨끗한 정치' 이미지를 내세워 돌풍을 일으켰다.[1]
이번 총선거는 전후 처음으로 임기 만료에 의해 치러졌으며,[3] 여성 당선자 수는 6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4]
3. 1. 정당별 의석 분포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의석수 | 의석 증감 |
---|---|---|---|---|
자유민주당 | 23,653,626 | 41.78 | 249 | -22 |
일본사회당 | 11,713,009 | 20.69 | 123 | +5 |
공명당 | 6,177,300 | 10.91 | 55 | +16 |
일본공산당 | 5,878,192 | 10.38 | 17 | -21 |
민사당 | 3,554,076 | 6.28 | 29 | +10 |
신자유클럽 | 2,363,985 | 4.18 | 17 | +17 |
기타 정당 | 45,114 | 0.08 | 0 | -2 |
무소속 | 3,227,463 | 5.70 | 21 | +7 |
계 | 56,612,765 | 100 | 511 | +20 |
자민당은 249석을 획득하여 제1당 지위를 유지했으나, 과반수 확보에는 실패했다.[2] 이는 1955년 창당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1] 일본사회당은 123석, 공명당은 55석, 민사당은 29석, 일본공산당은 17석, 신자유클럽은 17석을 각각 획득했다. 무소속 의원은 21석이었다.
3. 2. 득표율 및 투표율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증감(%) |
---|---|---|---|
자유민주당 | 23,653,626 | 41.78 | -5.07 |
일본사회당 | 11,713,009 | 20.69 | -1.21 |
공명당 | 6,177,300 | 10.91 | +2.45 |
일본공산당 | 5,878,192 | 10.38 | -0.11 |
민사당 | 3,554,076 | 6.28 | -0.70 |
신자유클럽 | 2,363,985 | 4.18 | +4.18 |
기타 정당 | 45,114 | 0.08 | -0.19 |
무소속 | 3,227,463 | 5.70 | +0.65 |
계 | 56,612,765 | 100 | 0 |
유효표 | 56,612,765 | 98.91 | - |
무효 및 백지표 | 623,857 | 1.09 | - |
투표 / 투표율 | 57,236,622 | 73.45 | - |
기권 | 20,689,966 | 26.55 | - |
유권자 | 77,926,588 | - | - |
자민당의 득표율은 41.78%로 지난 선거에 비해 하락했다. 사회당은 20.69%, 공명당은 10.91%, 공산당은 10.38%, 민사당은 6.28%, 신자유클럽은 4.18%를 기록했다. 총 투표율은 73.45%로, 이전 선거보다 1.69%p 상승했다.[1]
3. 3. 주요 특징
자유민주당은 다른 정당보다 많은 의석을 확보했지만, 22석을 잃어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으며, 511개 선거구 중 249석(47%)을 획득했다.[2] 이는 자유민주당이 처음으로 과반수 의석을 잃은 것이다. 1976년 선거는 록히드 사건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록히드 선거|ロッキード選挙|rokkīdo senkyo일본어로 알려지게 되었다.[3] 당시 총리였던 미키 다케오는 당내 개혁파로 여겨졌으며, 당내 일각의 바람과 달리 록히드 사건 수사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유민주당의 득표율에 분당된 신자유클럽과 자유민주당의 지지를 받지 않았지만 선거 후 자유민주당에 합류한 무소속 의원들의 득표율을 합산하면 보수 후보들의 총 득표율은 실제로 증가했다.[1]좌파 야당인 일본 사회당과 일본 공산당은 상당한 역풍을 맞았다. 사회당은 의석을 늘렸지만 5석에 불과했으며, 전 의장 2명(사사키 고조와 가츠마타 세이이치)과 현직 부의장이자 전 의장인 에다 사부로가 모두 낙선했다. 공산당은 21석이나 잃어 지난 선거 대비 의석 수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이는 투표 행위가 신자유클럽과 같은 새로운 온건파 후보에게로 몰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기존 야당 중 가장 큰 승자는 온건파 정당이었다. 공명당은 1972년 총선거에서의 스캔들에서 벗어나 창가학회와 거리를 둠으로써 회복에 성공했다. 공명당은 또한 다양한 좌파 운동을 지지함으로써 반(反)자유민주당 정당 이미지를 강화했다. 반면 일본 민주사회당은 득표율이 약간 감소했지만, 이번 선거에서 10석을 얻는 데 성공했다.[1]
자민당은 반 미키파(反三木派)의 힘이 강해 당내가 사실상 분열된 선거전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정치 부패에 대한 비판을 받은 자민당은 패배하여, 1955년 창당 이래 처음으로 공인 후보 당선자 수가 중의원에서 과반수를 밑돌았다. 실제로는 보수계 무소속 의원의 추가 공인으로 과반수를 확보했지만,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 미키 다케오를 이은 후쿠다 다케오 내각은 1940년대 이후의 여야 伯仲 국회(与野党伯仲国会) 운영을 강요받게 되었다.
야당에서는 사회당의 의석이 증가했지만, 정수 증가와 로키드 사건의 순풍을 고려하면 당내에는 승리감이 없었다. 이 선거에서 전 위원장 사사키 고조·가츠마타 세이이치와 부위원장 아카마츠 이사무·에다 사부로, 정책 심의회장 호리 마사오 등 당 간부들이 낙선했다.
언론 출판 방해 사건의 영향을 받은 전회 총선거에서 당 역사상 최초의 대패를 당한 공명당은 약진하여, 1955년 이후 자민·사회 양당 이외로는 처음으로 예산안의 재편 동의를 단독으로 제출할 수 있는 51석을 돌파했다. 민사당도 전회 총선거의 패배에서 거의 회복했다.
공산당은 반대로 패배하여 의석 수는 전전회 수준으로 돌아왔다. 일본 공산당 스파이 심문 사건이 이 해에 발행된 「일본 공산당의 연구」이나 국회 등에서 다루어진 것도 공산당 패배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1976년 6월에 고노 요헤이 등이 자민당의 정치 부패 체질을 비판하며 탈당·결성한 신자유클럽은 총선거 전에는 중의원 의원이 5명이었지만, 신선한 보수당 이미지가 유권자에게 강하게 지지되어 개선 의석 수의 3배를 넘는 당선자를 냈다. 특히 수도권에서는 압승을 거두었다.
이 선거에서의 여성 당선자는 6명에 그쳤다.[4] 이는 1946년 제2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여성 참정권이 인정된 이래 의원 수, 의석 비율(1.2%) 모두 최저이며, 이 기록은 그 후에도 깨지지 않았다.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의석수 |
---|---|---|---|
자유민주당 | 23,653,626 | 41.78 | 249 |
일본사회당 | 11,713,009 | 20.69 | 123 |
공명당 | 6,177,300 | 10.91 | 55 |
일본공산당 | 5,878,192 | 10.38 | 17 |
민사당 | 3,554,076 | 6.28 | 29 |
신자유클럽 | 2,363,985 | 4.18 | 17 |
기타정당 | 45,114 | 0.08 | 0 |
무소속 | 3,227,463 | 5.70 | 21 |
4. 선거 이후
1976년 총선은 124명의 신인 의원 당선과 일부 원로 의원 낙선으로 일본 정치 지형의 세대교체를 알리는 신호였다.[1] 이 선거는 중의원 임기 만료로 인해 실시된 유일한 전후 총선거이며, 다른 모든 전후 선거는 내각에 의한 중의원 해산으로 인해 치러졌다.[3]
자민당은 록히드 사건의 영향으로 22석을 잃어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이는 자민당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2] 당시 총리였던 미키 다케오는 당내 개혁파로 여겨졌으며, 록히드 사건 수사를 방해하지 않았으나, 낮은 내각 지지율을 기록했다.[3]
선거 후, 미키는 자민당의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당 대표직에서 사퇴했고, 후쿠다 다케오가 새로운 자민당 대표 겸 총리로 선출되었다.
4. 1. 후쿠다 다케오 내각 출범
1976년 총선에서 자민당은 록히드 사건의 여파로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2][3] 미키 다케오 총리는 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고, 후쿠다 다케오가 새로운 총리로 선출되었다.[1]1976년 12월 24일, 제79회 임시 국회에서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가 실시되었다. 중의원 투표 결과(총 508표 중 과반수 255표), 후쿠다 다케오는 256표를 얻어 총리로 지명되었다.[1]
후쿠다 내각은 자민당의 단독 과반수 붕괴로 인해 어려운 국정 운영에 직면했다. 1940년대 이후 처음으로 여야 의석수가 팽팽한 '여야 백중 국회' 상황에서, 야당과의 협력이 불가피해졌다.[1]
4. 2. 정치 지형 변화
자유민주당은 다른 정당보다 많은 의석을 확보했지만, 22석을 잃어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고 511개 선거구 중 249석(47%)을 획득했다.[2] 이는 자유민주당 역사상 처음으로 과반수 의석을 잃은 것이다. 1976년 선거는 록히드 사건의 영향을 크게 받아 '''록히드 선거'''|ロッキード選挙|rokkīdo senkyo일본어로 알려지게 되었다.[3]일본 사회당과 일본 공산당 등 좌파 야당은 상당한 역풍을 맞았다. 사회당은 의석을 늘렸지만 5석에 불과했고, 사사키 고조와 가츠마타 세이이치 전 의장 2명과 현직 부의장이자 전 의장인 에다 사부로가 모두 낙선했다. 공산당은 21석이나 잃어 지난 선거 대비 의석 수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이는 신자유클럽과 같은 새로운 온건파 후보에게 투표 행위가 몰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공명당은 1972년 총선거에서의 스캔들에서 벗어나 창가학회와 거리를 두고, 1975년 지방 선거와 이번 선거에서 창가학회 소속이 아닌 후보들을 내세움으로써 회복에 성공했다. 또한 다양한 좌파 운동을 지지함으로써 반(反)자유민주당 정당 이미지를 강화했다. 반면 일본 민주사회당은 득표율이 약간 감소했지만, 이번 선거에서 10석을 얻는 데 성공했다.[1]
참조
[1]
논문
The 1976 General Election in Japan
https://www.jstor.or[...]
1977
[2]
웹아카이브
第27章 公務員・選挙
http://www.stat.go.j[...]
2015-02-15
[3]
웹사이트
これまでの衆議院選挙
https://web.archive.[...]
Japan Association of Corporate Executives (Keizai Doyukai)
2014-01-27
[4]
웹사이트
(2) 女性議員数の推移、「平成13年度女性の政策・方針決定参画状況調べ」内
https://www.gender.g[...]
内閣府男女共同参画局
2018-05-20
[5]
간행물
『官報号外』昭和53年12月6日 第86回国会 衆議院会議録第1 p.2
https://kokkai.ndl.g[...]
[6]
간행물
『官報号外』昭和53年3月15日 第84回国会 衆議院会議録第13号 p.3
https://kokkai.ndl.g[...]
[7]
간행물
『官報号外』昭和54年3月15日 第87回国会 衆議院会議録第14号 p.6
https://kokkai.nd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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